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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 미국 역사를 오늘 포스팅에서 자세히 정리하여 다음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미국 여행, 미국 역사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미국 여행 시 알고 있으면 더 재밌는 미국여행이 될 것입니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아시아 항로를 찾아 떠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했습니다. 이 후 콜럼버스가 도달한 지역이 신대륙임을 알게 된 유럽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위한 신대륙 진출에 주력하게 됩니다. 1606년에 설립된 영국의 버지니아 회사는 버지니아 주에 최초의 영구적 영국계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town)을 설립했습니다. 원주민으로부터 담배 재배법을 배운 식민지 주민들은 식민지 정착에 큰 도움이 됐으며, 이러한 경제적 기회는 많은 영국인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1620년에는 영국 국교회에 반발한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떠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이후에도 많은 영국인들과 유럽인들이 종교적 자유나 경제적 기회를 찾아 북미 대륙에 정착했습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 주에 영국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 Town) 건설에 성공했습니다. 1620년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있던 청교도일파(Pilgrim Fathers)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1620년 12월 21일 지금의 매사추세츠州(Massachusetts)에 상륙해 플리머스(Plymouth)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한편, 청교도들의 신권위주의적인 체제에 반대하는 다른 종교인들은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코네티컷(Connecticut) 등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17세기 중엽 이후 영국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통해 뉴암스테르담(現 뉴욕)을 점령하는 등 지속적으로 북미 식민지를 팽창하며 1732년까지 총 13개 주를 건설했습니다. 이후 1754년 발발한 7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영국은 미시시피 강 동부에 위치한 북미 프랑스령 식민지를 양도 받았으나, 빈번한 전쟁은 북미주민들에 대한 조세 증가와 자치권 제한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반발한 식민지 주민들은 초기에는 의무(과세)에 상응하는 대표 권한(의회 의원 선출)을 요구했으나, 갈등이 심화되며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대륙 의회는 영국에 대한 '독립 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하고 공포했습니다. 이미 독립 선언 1년 전에 시작된 영국군과 美 대륙군 간의 전쟁은 1783년까지 지속됐으며,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 받았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미국은 1787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에는 미 대륙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건국 이후 미국은 행정부 및 법을 정비하고 13개 주 중간에 위치한 버지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 사이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등 국가건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80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매입해 영토를 확장했으나, 1812년에는 다시 한번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해 백악관이 불에 타기도 했습니다. 1812년 미-영 전쟁을 통해 인기를 얻은 앤드류 잭슨은 1828년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미국 내에서 살아가고 있던 체로키 족을 강제로 이주시키며 지속적인 확장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루이지애나 매입에 이어 현 오리건 지역까지영토를 크게 확장한 미국은 국경을 맞닿은 멕시코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는데, 멕시코로 이주한미국인들이 현 텍사스 지역에서 텍사스 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자 양국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미국과 멕시코는1846년부터 1848년까지 전쟁에 돌입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서부의 광활한 영토를 멕시코로부터 양도받으며 현재 북미 대륙 내 미국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급속적인 영토팽창은 자유주(free state)와 노예주(slave state) 간의 갈등을 더욱 야기하게 됩니다.
이미 윤리적인 이유와 경제성을 바탕으로 일찍이 흑인 노예 제도를 폐지한 북부 자유주와 노예 노동력을 근간으로 한 농업 중심의 남부 노예주는 미 의회 내 의석 균형을 바탕으로 위태롭게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균형은 신규 영토 대다수가 자유주를 지향함에 따라 무너지기 시작하며 정치적인 갈등요소로 대두되었습니다. 공업 중심의 북부는 노예제의 야만성에 대해 큰 회의감을 표명했으나, 주요 산업인 면화 산업에 있어 노예제도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판단한 남부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북부의 지지를 받은 에이브러헴 링컨이18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 주들은 미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아메리카 연합국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결성했습니다. 연방 유지파였던 링컨 대통령은 남부의 분리 행동에 대해 무력 사용이 가능하다고 경고했고, 이에 반발한 남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 인근 섬터 요새(Fort Sumter)를 포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 내전(American Civil War)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노예폐지 운동은 18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775년 첫 반(反)노예제 모임이 필라델피아에서 만들어졌고,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는 처음으로 <노예해방법>을 1780년에 통과시켰다. 이후 4개의 다른 북부주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며 1787년 북서부 영토(현 오하이오 주 및 그 주변)에서도 <북서부 조례>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이론 인해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와 노예제를 여전히 법으로 인정하는 남부의 두 지역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값싼 흑인 노동자의 수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돼 노예제도 반대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노예 소유를 허용하는 남부와 금지하는 북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링컨은 당시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들에서 노예제를 철폐하는 법안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1858년 "분열된 집에 대한 연설"에서 "노예제의 확산을 막고, 국민의 마음 속에 노예제의 궁극적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심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1850년대의 정치적 갈등은 새로 생긴 노예제를 확대할 지 여부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정부가 수립된 모든 준주(organized territories)는 자유주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남부는 연방에서 분리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노예제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 범위가 축소되거나 결국 폐지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에 연방 정부의 통제권이 넘어갈 것에 대한 남부의 우려와 노예제 지지자들이 정부에 휘두르는 영향에 대한 북부의 혐오는 결국 1850년 말의 위기 상황을 일으켰습니다. 노예제의 도덕성, 민주주의의 범위, 자유 노동과 노예제 간의 경제적 이득에 대한 논쟁들은 휘그당과 "노우 낫씽"(Know-Nothing)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고, 새로운 정당(1848년의 자유지역당, 1854년의 공화당, 1860년의 헌법 연합)들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1860년에 최후로 남은 전국 정당은 민주당이었지만, 민주당 역시 분파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노예폐지주의자 윌리암 로이드 게리슨이나 중도 공화당 지도자 링컨 등의 북부 정치인들은 토머스 제퍼슨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선언문 구문을 강조했습니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이 점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노예제도에 대한 남북간 의견대립이 팽배한 가운데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반대론자인 링컨은 북부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돼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다. 또한 남부7개 주는 이에 반발하며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 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아메리카 남부연합군(‘남군’: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Fort Sumter)를 포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동안 벌어진 미국 내전(American Civil War)을 미국남북전쟁(美國南北戰爭)이라 부릅니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통해 남부 노예 해방을 발표했고, 1865년 종전과 헌법 수정과 함께 흑인 노예들이 공식적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라고 불리는 종전 후 기간 동안 연방 정부는 연방군을 남부에 주둔시키고 남부의 변화를 시도했으나, 사회적 변화에는 실패해 유색 인종에 대한 격리 및 차별은 20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남부와는 달리 북부는 내전 이전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진 이민자들의 이주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이민 러시는 서부 개발, 전후 산업 인력 충원 등 다양한 필요에 의해 계속 유지됐으며, 미국 사회에서 기피되어 오던 남유럽 및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과 중국 이민자들도 19세기말에 대거 유입하게 됩니다. 1869년, 대륙횡단 철도를 완공한 미국은 광활한 영토와 이민자를 바탕으로 유럽을 넘어서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석유, 철강산업이 급속적으로 발전하며 시카고, 피츠버그, 클리블랜드 등 산업별 대도시들이 발전하기 시작 했으며, 토마스 에디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라이트 형제 등 주요 발명가들의 발명품들은 이러한 산업 발전에 더욱 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건국 초기의 고립주의 기조에서 벗어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카리브해, 필리핀 등을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킵니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독보적인 산업력을 구축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고립주의 노선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적 고립주의 원칙은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함께 사라지는 듯 했으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후 주도적으로 창설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미국 의회가 참여 반대를 표명하며 다시 한 번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미국은 오히려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등 보호무역주의적 제도를 도입해 영국의 전후 몰락 이후 공석이 된 시장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맡기를 거부했습니다. 최대 시장인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악성 제고 증가, 독일의 전후 배상금 문제에 따른 초인플레이션, 은행과 기업의 무분별한 투자및 대출은 결국 1929년 세계대공황을 야기했습니다. 미국과 세계 경제가 마비된 가운데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공 사업 확충 등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주창한 뉴딜(New Deal) 정책을 도입한다. 이와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은 산업 발전 기간 동안 소외됐던 노동계층을 위해 공정노동표준법, 사회보장법 등의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세에 들어선 미국과는 달리 유럽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파시즘과 공산주의 등 정치적 극단주의가 성행했고,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는 다시 한 번 세계대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1929년 발생한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발전에 제동이 걸리면서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 경제는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및 동남아시아 침공과 독일의 유럽 침공에 대해 다시 한 번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은 1945년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 처리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했고, 전쟁은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막을 내렸다. 1948년에는 1945년에 사망한 루스벨트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뉴딜정책의 정신을 이어갔으며, 대외적으로는 1차 대전 전후와는 다른 모습으로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시작된 소련의 동유럽 진출, 중국의 국공내전 및 6.25 전쟁 발발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 진영 간의 냉전의 시작을 알렸다. 1952년에는 공화당 소속의 2차 대전 전쟁 영웅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국 전쟁을 종결시킴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와 복지제도를 접목시키며 국민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산업 발전과 전쟁 등은 노동자와 여성 인권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 확대와 사회적 기여는 1920년, 여성의 참정권 및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19조의 채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민자들의 처우도 이 기간 동안 개선되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남유럽 출신자 및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사회적 장벽도 점차 허물어지며 1960년에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던 존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20세기 초반의 인권 신장은 주로 백인들만이 혜택을 받았으며, 남부 주정부들은 흑백분리를 표명하며 남부에 거주하는 흑인들에 대한 권리를 여전히 박탈하고 억압했습니다.
1954년, 학교를 포함한 모든 공공시설을 백인 전용과 흑인 전용으로 분리한 남부 주정부들의 정책에 대해 연방 대법원은 공립학교의 흑백분리는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남부는 반발했으며, 1957년에는 알칸자스 주 리틀록에 위치한 백인 학교 등교를 결정한 흑인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연방군이 주방위군과 백인 주민들과 대치하기도 했습니다. 흑인들과 민권운동가들은 흑인 대우 개선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려했는데, 그 중 마틴 루터 킹이 이끈 비폭력 저항 운동이 큰 지지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차별 철폐 노력은 결국 정치적인 성과로 이어졌는데,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흑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1964년 민권법’과 남부 흑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한 ‘1965년 선거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케네디(John F. Kennedy) 후보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당선됐으며 뉴프런티어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약소민족의 근대적 국민국가 창설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 빈곤을 없애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하고 이에 따라 평화식량계획 (Food for Peace Program)과 평화봉사단(Peace Corps) 창설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11월에 달라스에서 암살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은 흑인에 대한 법적인 평등을 보장했으며 사회보장제도와 환경보호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64년 11월에는 61%가 넘는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베트남 전쟁이 그의 발목을 잡으면서 정권을 공화당 닉슨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존슨 행정부와는 달리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행정부는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 국제외교관계에서 강대국중심의 세력균형 외교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71년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와 1972년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했고 1970년 2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 명시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사임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흑백차별 철폐, 사회보장제도 창설과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1964년에 61%가 넘는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베트남 전쟁이 그의 발목을 잡으면서 불출마를 선언, 결국 정권을 공화당 닉슨 대통령에게 넘겨주었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 등 외교정책에서는 성공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임기 중에 대통령 직을 사임했습니다. 이후 도덕 외교를 내세운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와 오일쇼크와 같은 외교적 난관에 의해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1981년 이후에는 공화당 소속의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미국은 전반적으로 보수, 안정 기조의 색채가 짙어졌습니다. 특히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를 이끌었던 베이비부머 세대의 급격한 보수화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힘을 실어주었다. 경제적으로는 ‘레이거노믹스’라는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정책이성공을 거두면서 미국 경제는 상당한 호황을 누렸다. 또한,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미국은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민주당 소속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전임 대통령들이 다져놓은 국내외적 성과를바탕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하고 IT산업을 육성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안정적인 내치와 외교정책, 그리고 경제 호황에 힘입어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했으나 집권 2기에 터진 성추문 사건으로 탄핵 위기까지 맞기도 했습니다. 2001년에는 공화당 소속의 조지 워커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에는 테러조직인 알카이다에 의해 사상 최대 규모의 테러가 워싱턴 DC와 뉴욕에서 발생해 미국과 전세계를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임기 초반의 부시 대통령은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 공격에 대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습니다. 미국과 동맹국은 알카이다를 비호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으며, 대량살상무기(WMD)의 생산 및 은닉 혐의를 받고 있던 이라크 후세인 정권에 대해서도 군사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굳건해 보이던 미국의 경제는 2007년 말 이후 심각한 경기 후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초대형 모기지론 업체들이 도산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미국과 전세계는 대공황이후 최대 규모의 경제 위기에 빠졌으며, 2008년 경제 위기의 여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중에 실시된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색 인종으로는 처음으로 버락 오바마 민주당 상원의원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월 20일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했습니다. 또한, 적극적·전향적 대외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11월 7일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 2013년 1월 20일부터 집권 2기를 시작했습니다. 2014년 12월 쿠바와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는 역사적인 연설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3차레에 거쳐 쿠바 엠바고를 완화하는 등, 쿠바와 국교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 중에 있습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해 유엔 안보리상임이사국과 독일이 진행한 이란과의 핵협상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2015년 7월 14일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2015년 8월 오바마 행정부는 2030년까지 미국 발전소들의 탄소배출량을 2005년 수준에서 32% 감축을 목표로 하는 청정발전계획(Clean Power Plan)을 발표하는 등 기후변화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 회의에서도 190개국이 체결한 파리협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주요 통상 의제는 아태지역 12개국이 2015년 10월에 타결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유럽과의 FTA인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이 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미국 여행 시 알아 두면 좋을 미국의 일반 정보인 미국 여행, 미국 역사 정리하였습니다. 미국 여행에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